행인(杏仁)의 온두레미디어

걷고 또 걸어 이 산을 넘어서면 안개를 뚫고 이 산을 넘어서면 민들레 춤을 추는 꽃마을이 있다거니 밤마다 마루에 앉아 별을 헤아린다거니 가서 보지 않아도 아는 이는 안다 말거니 구현되지 않은 진심은 마을에 살지 않으니

입하 무렵 눈 시린 가로등 아래 수북수북 함박눈 아침 햇살 눈부실 제 하얀 쌀밥 고봉밥 자껏 비나 쏟아져라 밥알이나 맛보게 지지리도 보릿고개 벼슬이 장땡이다 이왕에 자시려거든 하얀 쌀밥 고봉밥 밤 새워 땅을 파자 풍년 들지 모르니 - 杏仁 김수돈 2016.5.31

나 그때 그대에게 비단 두 필 건네준 것은 단지 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그대 옷감이 필요한 순간에 그것이 내 손에 있어서였습니다 그 뒤로 다시 그대 돌아보지 않는 것은 나 그대 미워함이 아니라 단지 더 이상 비단이 없어서일 뿐입니다 감당 못할 연민으로 그대 돌아보면 그대도 빈손인..

길을 가다 매급시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있다. 상대는 그저 제 길을 갈 뿐인데 웬 일인지 그의 발길이 내 걸음을 자꾸만 방해한다. 그의 뜻과 관계없이 내 앞길을 막는다. 심하게는 그가 호의를 품고 내게 다가서는 순간에조차 다리가 서로 엉키고 만다. 포옹한답시고 이마를 부딪히기도 ..

-갑질의 방식 우선 꽁꽁 묶어라 행여 다리가 삐져나올지 모른다 혹시 날개라도 튀어나올지 몰라 그러니 앞뒤 가리지 말고 묶어라 아침부터 밤까지 새끼줄로 꽁꽁 묶어 아무런 정신도 없게 하라 회의는 밥먹듯이 하라 시작 전에 무슨 일 하는 게 좋을지 회의하고 시작 후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회의하고 일 하다가 잘 하고 있는지도 회의하라 그러면 일한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도 회의해야 하리니 일하기 전에 먼저 회의를 느끼게 하라 여가는 조직 안에서 충분히 제공하라 개인적 여가는 금물이다 마약일지도 모른다 일터에서 충분히 여가를 제공하여 여가를 찾을 명분이 없게 하라 일터와 가정은 양립하니 차라리 가정을 일터로 끌어들여라 인맥은 조직 안에서 공유하라 공유 없는 인맥은 개인의 일탈을 부를지 몰라 조직적 사고도 깨질지 ..

어제 한 말이 많아 오늘은 쉬기로 했다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홍수가 나고 말 거야 아침에 깨면 곧 머리를 짓누르는 말의 평균치 뙤약볕에 쓰레기 썩듯 뱉어쌓인 말 이내 썩어난다 그냥 버릴 말과 재활용할 말을 분리하다 말고 손가락 베듯 가슴을 에이고 가는 말의 칼날 ‪#‎행인&#..

무던히도 귀를 파내던 시절 있었지 누군가 욕을 하면 가렵다고 여기자 정말로 가려워지기 시작했고 귀를 파내면 그 욕 닦아내는 것 같았어 온갖 질시에 험담에 부딪혀 살던 그 때 귀를 파지 않고선 견디지 못했던 그 때 귀파기란 씻음의 의식이었네 귀에 피 터지고 부어오르라고 파내던 ..

화려한 불빛 속에 꿈틀대는 길가메시 밤하늘 울려나는 나팔소리는 길 가며 시 별 따라 걷는 이 몸은 다 못 참고 길 가며 쉬

우리가 층층대라면 나는 맨 밑에 고인 발판이 되겠다 검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층층시하에 줄방귀 참는 끝순이 쯤이겠다 당신이 나를 밟고 간 첫 발자국은 높은 데로 가서 하얗게 나를 잊는 것이겠다 송아지처럼 간 발자국만 있고 온 발자국은 없겠다 처음 놓였으나 마지막이겠다 먼저 놓였으나 나중이겠다 올라갈 때 맨 먼저 밟고 지나갔듯이 내려올 때 당신은 마지막으로 나를 밟겠다 2016. 작가의 눈 22호

겨울꽃이라더라 흐린 연못 거울 삼아 제 얼굴에 빠져버린 깊이 아주 깊이 빠져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당신은 추운 겨울 제 홀로 핀 꽃이라더라 "봄밤이다. 일어나라!" 뒤돌아도 보이지 않는 깨진 거울 속 희미한 당신을 향해 나는 닿지 않는 주문을 외운다 바람도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