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미디어 교실/괴테를 배운다

괴테의 성숙기-바이마르 시절

행인(杏仁) 2006. 8. 3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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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괴테는, 1786년 9월 남몰래 쫓기듯 서둘러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

오랫동안 미루어온 이 도피는 괴테의 죽음인 동시에 재탄생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인간과 예술가로서 새로운 부활을 모색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성적·문학적·문화적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했다.

 한때 찬사를 보낸 고딕 양식의 우매함을 조소했고, 베로나에서는 줄리엣의 무덤보다는 박물관에 있는 그리스 묘석에 더욱 애착을 보였으며,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이나 총독의 궁전보다는 팔라디오가 지은 교회들을 찬양했다.

 아시시에서는 미네르바 신전에 대한 관심으로 중세적 번영을 완전히 무시했으며, 고대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하기를 고대하였으나, 그것조차도 대그리스(Magna Graecia)와 파이스툼의 사원들의 서막으로 간주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시칠리아 섬의 고전적 장려함도 호메로스 세계의 서막으로 간주하여, 마침내 이 고대세계를 빼어난 단편극 〈나우시카 Nausikaa〉(1789)에서 그려냈다.

 그는 그리스의 고대양식에서 인간의 원형을 모색하고 발견했듯이 이 풍경들 속에서 그러한 개념을 식물에까지 넓게 조명했다.

 이러한 추구는 그의 문학작품에서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유형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창조와 보편적이고 초시간적이면서도 극히 개별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주제, 엄격히 규제되면서도 개인적 정열의 울림을 싣고 있는 운문들로 이어졌다.


 형식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은 이탈리아에서 개작한 4편의 희곡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1790년에 출판된 〈단편 파우스트 Faust, Ein Fragment〉는 〈초고 파우스트〉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을 극적인 단일성을 위해 결합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작품이 궁극적으로 취하게 될 거대한 문화적 상징으로 진일보한 것이다.

〈에그몬트〉는 실제로 운문작품은 아니지만, 밀도 있는 언어의 짜임새 때문에 시극(詩劇)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것이 음악으로 작곡되는 것은 점진적인 수렴과 주제들의 집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는 개인적·정치적 문제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괴테가 창조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들인 에그몬트와 애인 클레르헨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순박한 독립심이 고양된 형태인 내적 자유를 구현한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마성적인 한 인간의 극적 묘사로 시작한 이 작품은 자유라는 이념 자체의 비극, 즉 타산이나 간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물과 사건들의 예기치 못한 연계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유의 숙명에 관한 비극이 된다.


〈토르크바토 타소〉에서는 운문에서나 가능할 정도로 밀도있는 언어들이 계속 이어진다. 괴테 자신도 이 작품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썼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인, 즉 인간들의 평범한 의사소통수단을 매체로 하는 예술가에 관한 희곡으로는 걸맞는 양식이다. 여기서는 비극적 갈등 자체가 다양한 언어 양태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며, 여기서 벌어지는 감정적 충돌도 그러한 언어의 갈등에 의한 부수적인 것으로서 제시된다.

 이 작품에서 외적 행동의 빈약함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사소한 고민거리도 5분이 지나면 소포클레스에 필적할 만한 주제로 만들어버린다"는 '시적 특성'을 고려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타소를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기보다는 그와 그의 작품을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사회에 둠으로써, 괴테는 시인과 세계 사이의 치유할 수 없는 '간극'을 한층 날카롭게 부각시켰다. 극도의 고통마저 불멸의 시로 바꿀 수 있다는 시인 타소의 새로운 인식조차도 그러한 균열을 메우지는 못했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세계에 접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ie auf Tauris〉(1787)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근대적이고 비(非)그리스적'이라는 실러의 평은 옳았다. 〈토르크바토 타소〉와 마찬가지로 작품도 의사소통의 문제, 즉 발설한 말의 예기치 못한 위력, 나타내는 것 만큼 감추는 언어의 이중적 양태, 진실의 반대가 명백한 거짓이라기보다는 자기 은닉이 되는 점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 작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화를 자신의 무의식의 반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노력을 다루며, 시야를 새로이 조정함으로써 현재의 인간을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연쇄를 파기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본래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아테네 여신을 갑자기 출현시켜 작품의 결말을 이끌지만 괴테는 새로운 시각으로 화해로운 결론을 맺고 있다. 즉 그는 신탁의 말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이 희곡은 그리스적 가치관과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피게니에와 디아나 여신을 동일시하여 육체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18세기 인문주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탈리아 기행을 통한 서정시의 가장 큰 수확은 〈로마의 비가 Römische Elegíen〉(1788~89)이다. 조형적 아름다움과 대담한 관능을 표현하고 문화 유산에 대한 고양된 의식과 애욕적인 부드러움을 결합해 낸 점에서 이 이교도적이고 고도로 세련된 시들은 어떤 현대 언어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만일 이 시들이 바이런의 〈돈 주안 Don Juan〉의 운율로 씌어졌더라면, 아주 저속한 것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 이행연구는 이 시에 감추는 듯 하면서도 드러내는 심미적 거리의 베일을 씌운다.

 이 비가를 탄생시킨 장본인은 하급 공무원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이다. 괴테는 그녀에게 매혹되어, 결국 1788년 4월 바이마르로 돌아온 뒤 곧 동거하게 되었고 아이까지 몇 명 낳았다.

 그러나 비순응주의자인 그가 사회관습인 결혼에 순응하게 된 것은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던 1806년에 이르러서였다. 결혼식은 전쟁이 끝난 지 4년 뒤 바이마르 궁정에서 거행되었다.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의 결과 괴테는 관심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화가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로마의 화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연습했으나, 그림을 통해서는 자신의 심오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었고, 드문 경우를 빼고 많은 소묘들은 감수성있는 아마추어가 줄 수 있는 매력 이상의 것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각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과학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도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고, 많은 미학에 관한 글과 평론을 더욱 정확하게 만들었다.

 그가 마침내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자신의 재능을 문학과 과학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도 이 여행에서였다.


 그러나 1790년의 2번째 이탈리아 방문은 실망만을 안겨주었고, 외부세계의 혁명적 사건들로 인한 불안감은 계속 깊어졌다. 〈베네치아의 경구 Epigramme Venedig〉(1790)는 이러한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

 1792년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의 불운한 프랑스 원정 때 그를 수행했는데, 이때의 체험을 〈프랑스 종군기 Campagne in Frankreich〉(1792)와 〈마인츠 공방전 Belagerung von Mainz〉으로 남겼다.

 그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의 입장은 저지(低地) 독일어로 쓴 풍자시를 개작한 〈여우 라이네케 Reinecke Fuchs〉와 〈독일 피난민들의 대화 Unterhaltungen deutscher Ausgewanderten〉 및 희곡작품 〈대(大) 코프타 Der Gross-Cophta〉·〈흥분한 사람들 Die Aufgeregten〉·〈시민장군 Der Bürgergeneral〉에 나타난다.

 이 3편의 희곡들은 예술적 가치보다는 독일 시인이 거의 쓰지 않는 정치문학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그러나 괴테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불멸의 시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혁명이 퇴조할 무렵에 이르러서였다.

 프랑스 혁명은 피난민 문제를 호메로스풍으로 다룬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의 배경이 되며, 〈서출(庶出)의 딸 Die Natürliche Tochter〉(1804)의 전체 구성을 지배한다. 3부작으로 계획되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서출의 딸〉은 당대 최대 사건인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괴테의 마지막 결산이었다.

 그 형식적 완전함의 저변에는 혁명적 현상을 비롯해 자연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삶을 영속하는 데 있어 죽음과 파괴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깊은 우려가 깔려 있다. 

ARTICLE

괴테, 바이마르로 가다

 

괴테의 바이마르 여행은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는 바이마르 영주 카를 아우구스트 공(公)의 초청으로 그곳에 가서, 1832년 3월 22일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 이때부터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1824)에는, 그가 공을 들인 오랜 숙련기간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또한 아우구스트 공의 요청으로 많은 공직을 수행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마침내 소공국에 없어서는 안 될 각료로서 광산 검열, 관개시설 감독, 심지어 군대제복지급안을 계획하는 일까지도 도맡아 했다.


괴테는 또한 궁정 관리의 부인 샤를로테 폰 슈타인을 만난 뒤 정열적 헌신을 통해 성숙해갔다. 그녀는 지적 차원에서 그가 만난 최초의 여성이다. 그녀가 괴테의 삶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그녀에게 보낸 1,500통 이상의 편지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녀는 괴테의 삶을 인도하는 기둥이 되어 그에게 사회생활의 미덕을 가르쳤고, 세세한 일상생활에까지 자극을 주었으며, 그의 상상력과 소망을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예절과 관습적인 미덕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를 견지했다. 그에게 누이 이상은 결코 되지 않으려 했고 그녀가 괴테에게 요구한 승화의 감정은 "왜 당신은 우리에게 그윽한 눈길을 던집니까?"(Warum gabst du uns die tiefen Blicke?)라는 정신분석적인 탐색의 말에서부터 오레스테스의 고통 및 이피게니에에 의한 위안.. 등의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

 이밖에도 이러한 통찰 속에서 그가 쓴 작품이 바로 단막극 〈남매 Die Geschwister〉(1776)이다. 〈달에게 An den Mond〉·〈잔 Der Becher〉·〈사냥꾼의 저녁노래 Jägers Abendlied〉·〈바다여행 Seefahrt〉 등 유명하고 사랑받는 서정시들을 비롯해서 2편의 〈나그네의 밤노래 Wandrers Nachtlieder〉와 같은 뛰어난 작품들은 모두 슈타인 부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시들과 이 시기의 다른 시들 〈인간성의 한계 Grenzen der Menschheit〉·〈물 위의 정령들의 합창 Gesang der Geister über den Wassern〉·〈신적인 것 Das Göttliche〉·〈겨울 하르츠 기행 Harzreise im Winter〉·〈일메나우 Ilmenau〉등에서, 자연은 더이상 인간정신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무엇, 인간에게 무관심하며 거의 적대적이기까지 한, 어떤 개념 내지 힘의 응결로 나타난다.

 이 새로운 '객관성'에 관한 인식은 괴테로 하여금 더욱 과학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워낙 다면적인 그는 원하기만 하면 〈툴레의 왕 Der König in Thule〉(1774)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무의식적인 힘의 투영으로서의 자연을 그린 〈마왕 Erlkönig〉이나 〈어부 Der Fischer〉 같은 발라드를 쓰고 많은 종류의 징슈필(Singspiele)과 뮤지컬을 만들어서 이것들로 궁정에서 여흥을 베풀기도 했다.

〈감상주의의 승리 Der Triumph der Empfindsamkeit〉라는 논문에서는 바로 자신이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주는 감수성을 풍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이마르에서의 공직 참여나 슈타인 부인과의 사랑이 〈에그몬트〉·〈파우스트〉·〈타소〉·〈이피게니에 Iphigenie〉 등의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안정과 휴식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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