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에 느낀 인간적·정신적 고독감은 뜻밖에도 실러를 만나면서 완화되었다.
괴테가 새로운 잡지〈호렌 Die Horen〉(1795~97)의 기고 요청을 받아들인 데에 답하여, 실러는 “1794년 8월 23일자 편지” 에서 놀라운 통찰력으로 괴테의 삶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실러가 보기에 괴테는 순박한 시인의 화신이었으나 그 순박함이란 의식적인 것이었다. 감정이 성찰로 이행되고 그 성찰이 다시 감정으로 환원되는, 즉 정신의 개념이 다시금 오관의 지각으로 바꾸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한 의식적 동조는 실러가 추구했던 “보다 추상적인 성찰방법”과는 다른 것으로, 이러한 차이야말로 그들의 풍부하고 생산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두 사람이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독일문학의 가장 위대한 시기의 이상과 업적에 관한 귀중한 논평일 뿐 아니라 예술적 창조의 과정에 대한 놀랄 만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후 몇 년 동안 괴테가 쓴 작품들은 그들의 고전적 이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가장 애호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헤르만과 도로테아〉는 '내면에서부터 그리스인을 창작하려는' 그의 시도이며, 여기에서 그는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인간성을 창조했다고 주장하였다.
등장인물들은 남녀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그들의 이름조차도 상징적이다)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 없는 유형적 인물들로서, 평화와 가정과 가정적 미덕들을 수호한다.
그러나 괴테의 작품이 항상 그러하듯,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들은 항상 확고한 존재들이 아니라 인간적·인도적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할 필요가 있는 자들로 묘사된다.
파우스트와 트로이의 헬레나의 결합을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그리스와 독일의 융합으로 부각시킨 〈파우스트 2부 Faust Der Tragödie Zweiter Teil〉의 헬레나 막(幕)에서, 괴테는 그리스 정신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그려내었다. 비평가들은, 만일 고전 그리스어로 번역된다면 그것은 아테네 희곡의 잃어버렸던 한 단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라고 했다.
미완성 서사시 〈아킬레스 Achilleis〉는 '자기 식으로 그리스인이 되려는' 그의 마지막 시도이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은, 점차 자연주의적이고 경향적인 것을 요구하는 세계에서, 문학의 유일한 희망은 상징적인 방책들의 도입으로 시적 세계를 밀봉하는 데 있다는 실러의 확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1910년에 초판본이 발견된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
Wilhelm Meisters Theatralische Sendung〉은 그 주제가 삶에 대한 소명으로까지 확대된다. 예술이 진실이나 도덕성의 시녀는 아닐지라도 더 나은 인간과 더 나은 시민으로 개선시키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허구적인 사실주의는 이제 추상과 융합되어,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는 심리적으로 날카롭지만 전체적인 시적 의미에 종속되어 있다. 당대 사회를 그린 소설 속에 하프 연주자나 미뇽 같은 신비롭고 매혹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신의 소설이 '철저히 상징적'이라고 한 괴테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듯하다.
한편 실러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계속 집필하도록 권유하였으며, 이 '이방인적 작품'을 고전주의 이상과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의 난점, 즉 '이념'의 중요성을 미래 예술의 선행요건인 '극'의 요소와 결합시키는 데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러한 문제점을 강조함으로써 실러는 〈파우스트〉에서 '천상의 서곡'의 철학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무대 전곡(前曲)'의 허구적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의도를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파우스트 제1부 Faust, Erster Teil〉(1808)를 연애소설로 보고 그 작가를 낭만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그 단계에서는 아직 그레트헨 비극에 나타나는 참을 수 없는 비감이 서구인의 보다 광범한 비극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괴테와 실러는 그들의 예술과 문학의 이상을 전달하려고 한 잡지들(괴테의 〈프로필렌 Propyläen〉지는 실러의 〈호렌〉지를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의 실패를 교양 없는 대중들의 무관심 탓으로 돌리고는, 로마 시인 마르티알리스풍(風)으로 쓴 400여 행의 신랄한 2행연구로 된 시 〈크세니엔 Xenien〉에서 실망을 나타냈다.
그들은 비방자에 대한 보다 더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뛰어난 담시들을 썼다.
이렇게 쓴 〈보물파는 자 Der Schatzgräber〉·〈코린트의 신부(新婦) Die Braut von Korinth〉·〈마법사의 제자 Der Zauberlehrling〉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초기 시들과 다르다.
또한 성찰을 위한 '해롭지 않은' 마술이 의식적·역설적으로까지 도입되었다. 괴테는 서정적·서사적·극적 요소들이 혼합된 담시에서 그가 식물세계에서 발견한 식물의 원형(Urpflanze)과 유사한 시의 원형질(Urei)을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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