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인

숲 이야기 -남월 김수돈

행인(杏仁) 2005. 5. 21. 12:11

     한 무리의 숲이 있었다.

     들 가운데 작은 언덕배기
     아침이면 이따금씩 볕이 들고
     자주 그늘에 묻히우는
     그런 자리에
     작은 숲이 한무리 있었다.
     
     나무가 많지도 않았다
     나뭇잎이 많지도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숲을 볼 때마다
     상그러운 느낌이라고 했다
     숲 가운데 누군가 볼상 사나운 돌덩이를 쌓아
     놓았어도
     숲에선 이상스레 기분 좋은 향이 난다고 했다

     사람들은 땔감이 없어도
     나무가지 하나 잘라내지 않았다
     밑둥을 덮은 마른 잎 하나 거둬가지 않았다
     숲에선 갈수록 더 진한 향기가
     풍겨 나고 있었다

     마을에선 사람들이 서로를 믿기만 했다
     숲이 풍성해 질수록 믿음도 깊어갔다
     숲 건너편에 큰 공사가 벌어져 먼지가 날려도
     사람들은 작은 숲이 있어서 마음에 둘 필요 없었다


     읍내 학교에서 영농발대식 열린 어느 봄날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대문도 없는 집을
     낮잠많은 강아지한테 맡겨 뒀었다
     누가 와도 그저 꼬리칠 줄만 아는
     어린 강아지...

     노을이 들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을 때
     마을로 돌아 오던 사람들은
     예전에 듣지 못했던 울음소리에
     흥겹던 노래가락을 멈췄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소리여서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침묵은 갓 시집온 오수댁이 깨뜨렸다
     "강아지가 다 죽어가는 개비네"

     사람들은 금새 마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기진맥진해 있는 강아지를 봤다
     얼마나 짖어댔는지, 너부러진 채 신음하는
     처량한 모습을
     봤.다.      
 
     침묵이 아까보다 조금 길었다
     강아지 울음이 작아질수록
     마을은 정적 속으로 빨려 드는 듯 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 갔다
     그 날밤은 마을에 불 켜진 집이 없었다

     숲에서 나는 향기가 갑자기 사라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다들 깊은 정적 속에 잠이 들었다
     그 때까지 느껴 온 향기에 젖어 있었기에
     자기들이 관성의 법칙에 끌려가는 줄도
     몰랐다
       
     사람들이 다른 때보다 일찍 깨어난 건
     또 하나의 이상한 소리 때문이었다
     소리라기보다는 소음,
     아니 그때까지 들어 보지 못했던 굉음이었다

     소리를 따라 눈길을 돌리던 사람들은
     그 때까지 봐 왔던 어떤 걸 볼 수가 없음을
     겨우 깨달았다. 숲이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커다란 불도저 한 대가 언덕을 깎아 내리고 있었다      
     
     그 때부턴 숲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도저와, 숲이 사라진 이유와
     얼마전부터 쌓인 돌덩이의 상관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숲건너 골프장 공사가 끝나고 진입로가 뚫린다는 소식을
     이장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사람들은
     아예 숲의 향기를 잊고 있었다

     며칠 뒤, 걸을수록 발이 피곤한 아스팔트가 대신 깔려졌다.
     영어로 씨씨 라고 쓰여진 입간판이 내 걸리고
     마을의 몇몇 사람은 골프장 잔디 깎는 일로 취직을 했다
     이장집 딸은 멋쟁이 짧은 치마를 입고
     골프장 손님을 따라 ,하루 종일 잔디밭을 돌아 다녔다        

     이제 거기 작은 숲은 없었다
     좀 더 먼 곳에
     골프장을 위한 장식물이 있을 뿐이었다

     숲은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젤 먼저 멀어져 갔다
     어른들도 차츰 숲을 잊어 갔다
     옛날에는 마을 건너에 숲이 있었다고,
     가끔 얘기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향내 좋은 숲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른들이 하나 둘 원래 왔던 데로 돌아 가고
     아이들이 또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됐을 때
     숲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숲을 없앤 골프장 진입로는
     바로 옆 고구마밭을 먹어 들어와
     4차선으로 확장되고
     마을의 집들은 하나 둘씩 벽돌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숲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옛날엔 작은 숲이 있었단다"
     한마디 말해 줄 사람도 없었다

     숲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

 

1996.11.1  -남월 김수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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