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문화원’ 설립 절실하다
전주 삼재(三齋) 중심 유학사상 조명 필요성, 간재학 학술대회에서 제기
‘한국 근대의 유학사상과 간재학(艮齋學)의 계승발전’을 주제로 한 2009년 간재학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12월 12일 전북대학교 진수당 가인홀에서 개최됐다.
간재학회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간재학회와 전북대학교가 공동주최한 이 학술회의는, 구한말 간재학파와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한주학파(寒洲學派) 간에 벌어진 논변의 핵심쟁점을 분석하는 것과 함께, 전주지역 유학사상의 모습을 조명함으로써 전주지역의 전통 유교문화 원형복원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날 학술회의는 간재 문하의 대표 유현(儒賢)으로 전주 삼재 (三齋), 금재(欽齋) 최병심(崔 秉心)과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경암(敬菴) 최원(崔愿)의 학문사상을 제 2주제로 채택해 주제발표와 토론을 펼쳤다.
간재는 전주 출신으로, 기호학(畿湖學)의 학맥을 계승하면서도 독창적인 성리학(性理學) 이론을 정립한 구한말 대표 유학자이다.
간재는 현종 7년(1841)에 지금의 전주시 다가동에서 태어나 6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문헌 ‘간재집’을 남겼다. 유학자들 사이에 “공자에서 비롯한 유학은 간재에게서 마지막을 마쳤다”고 말할 정도로 간재 선생의 학문은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3천여 명의 제자를 양성해 “공자 이래 이토록 많은 제자를 기른 이가 없다”는 칭송을 받았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과 나라의 강상(綱常)을 바로 세울 것, 나라 안의 오적(五賊)을 참수하라는 내용의 상소문(청참오적, 請斬五賊)을 고종에게 올렸고, 1908년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서해 왕등도로 들어간 뒤, 고군산도, 계화도로 거처를 옮겼다.
간재 선생의 학덕은, 그가 1922년 작고하자 상복을 입고 영구 뒤를 따른 사람이 무려 2,000여 명 이었으며, 장례에 참례한 인파가 6만여 명이 넘었다는 데서도 짐작할 만하다.
[간재학] 조선시대 성리학은 크게 영남학파(퇴계 이황), 기호학파(율곡 이이)로 구분하지만, 19세기 구한말 유림은 그 학문적 내용과 인적 구성을 바탕으로, 기호 계열의 화서(華西. 이항로), 노사(蘆沙. 기정진), 간재(艮齋. 전 우)와 영남계열의 한주(寒洲. 이진상) 4대 학파로 대별한다. 이 중 화서, 노사, 한주는 독자적인 성리설을 주장함으로써 주자학을 수정하는 쪽이었던 데 비해, 간재는 율곡의 성리설에 기초한 전통적 논의를 고수했다.
국망(國亡)의 상황에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도 다르다. 간재는 계화도로 망명해 유학의 전통을 지키고자 한 데 비해, 화서와 노사는 의병운동을 적극 주도했고, 한주는 산에 들어가 은둔하거나 일부 개방적 사고를 보였다. 이 차이는 각 학파의 철학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간재는 ‘리는 작용이 없다(理無爲)’,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다(性師心弟), 심은 성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心本性) 등 명제를 제시하며 화서, 노사, 한주 등을 비판해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는 조선시대 성리설의 분화를 마무리 지었다는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 간재에게 리(理)는 본래 통일적 원리로 이 세계에 주어진 것이며, 문제는 이를 실현하는 기(氣)에 있었다. 성사심제(性師心弟)는, 성(性)을 우위에 놓지만 논의의 중심은 심(心)에 있다. 성은 현실 에서 인의예지 같은 윤리적 덕목으로 주어진 것이고,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인간에 있다. 이 입장에서 보면, 유교적 질서에 의해 구축된 현실세계의 원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며, 현실의 혼란은 일시적인 것이다. 간재가 학자로 자처하고 은둔자의 길을 택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간재의 사상과 처세관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전국적 분포를 보인 제자들은 스승의 염원과 학설을 지키는 데 남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현재 관련 학계와 재야에서 활약하는 인물 상당수는 간재의 학맥과 관련 있다. 대학, 전통서당, 한문교육기관, 유림 단체 등에 널리 분포된 간재의 제자들이 끊어져가는 한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학의 마지막 보루 ‘전주 최학자’
간재에게 사사할 당시 간재는 “금재는 나에 못지 않은 학장이며 그의 학문은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격찬했다. 유림사회는 금재를 ‘제 2의 간재’라 칭하기도 하고 ‘간재와 금재는 이 고장의 쌍벽’이라 하기도 했다. 또 “절의에 있어서는 간재보다 금재가 더하고 능가할 만큼 매섭고 굳센 사기(士氣)의 소유자”라 할 만큼 백절불굴의 항일 투사이기도 하다. 유저(遺著)로는 시 1천여 편과 철학에 관한 잡서 12권, 그리고 일정 때 수사망을 피해 심지에 말아 인편으로 주고받았던 편찰 수백 통이 전해지고 있다. 제자로는 엄명섭, 박인규, 송 열, 송정훈, 박종호, 윤제술, 김상기, 송준오, 최귀만, 홍현식 등이 있다.
금재와 더불어 전주 3재라 불리운 이가 유재 송기면, 고재 이병은이다. 이들과 경암 최 원 역시 간재의 문하생으로서 그의 유학사상을 계승해 학문에 힘썼던 전주지역 대표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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