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땅깔’의 행렬을 보았다! - 오체투지 참관기-
“어, 이상한 사람들이네?” 행렬을 지나쳐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날아 나온, 철없는 어린아이의 말소리가 참 또렷하게도 귀에 꽂힌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황토색깔 조끼에 깃발을 들고 땅바닥에 활짝 엎드렸다가 일어나 걷고, 다시 엎드렸다 걸으며 길을 가는 이상한 사람들,...”
사람들이 우리를 순전 ‘땅깔’로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지금 우리는 ‘땅깔’로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땅깔’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사회의 온갖 오염물질이 짙게 배어 있는 아스팔트 길 위에 납작 엎드려, 여기서 은근하게 풍겨 나오는 역겨운 냄새를 온통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채,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통스러운 벌을 서고 있는 이들. 오체투지 순례단이야 말로 ‘땅깔’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땅깔’로 볼 것이다.
그렇다면 오체투지 행렬 뒤를 어정어정 따라가며 굽신굽신 절을 하는 나란 존재는, 그저 ‘땅깔’들의 뒤를 마지못해 따라가는 어정쩡 인생이다.
우리네 인간이 하찮게 여기는 작은 벌레처럼,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로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당에 닿도록 엎드려 하는 큰 절. 오체투지라는 이 고통스러운 행위가 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
오체투지 행렬을 처음 찾아올 적엔, 나는 이것을 수도자들의 엄숙한 순례 행렬이라 여겼다. “생명의 길, 평화의 길, 사람의 길”이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제시된 고행의 길이기에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이 행렬에 끼어들었다. 오체투지가 시작된 지 두 달이 넘도록 단 한 차례도 찾아 나서지 못했던 것이 못내 불편했던 탓이다.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을 지나는 1번 국도와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하루 순례길이 시작된다. 한편의 수묵화처럼 들녘에 자욱이 퍼져 있는 아침 안개 덕분에 10월 중순의 풍성한 가을 들판도 모두 아득하게 뒤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다.
안개 길을 달리는 차량들은 앞뒤에서 불빛을 번쩍이며 오간다. 위험한 찻길을 따라 오체투지 순례단은 길을 간다. 평일이라서 오늘 참여한 수는 적은 편이라 한다. 길을 안내하는 차량 운전자에다 뒤를 따르며 안전을 지켜 주는 요원들까지 합해도 스무 명이 채 못 되는 행렬이다.
공해와 오물로 찌든 찻길을 따라, 누구는 묵묵히 엎드려 가고 누구는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른다. 숱한 자동차가 검은 매연을 내 뿜으며 달려가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쉬지 않고 일어나는 굉음과 진동, 고무 타는 냄새 따위가 이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온몸을 뒤덮어 온다.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반배를 하며 조용히 따라 걷는다. 아침 출근을 오후 출근으로 미루어 두고 찾아 온 출근복장의 나인지라, 순례단이 하듯이 오체투지를 할 형편은 아니다. 이렇게 뒤따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벅찬 일이니, 근엄한 표정을 지을 수도, 고행하는 수도자의 표정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짐짓 허리를 깊이 숙여 본다. 1미터 남짓한 높이에서도, 비릿하니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더럽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랜 시간 아스팔트에 배인 기름때와 우리 인간사회의 해묵은 때가 몽땅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탓이리라. 이렇게 반배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데, 지금 내 앞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고 이 아스팔트 길 위에 얼굴을 맞댄 순례단은 얼마나 견디기 힘이 들까?
스스로 고행을 택한 오체투지 순례단의 가는 길은 하나도 거룩하지 않다. 오로지 더러울 뿐이다. 가는 이들이 도로에 버리고 간 것들은, 고스란히 순례 행렬에게 다가든다. 담배꽁초와 재, 먹다가 버린 음식찌꺼기, 시커먼 기름때, 동물들의 똥 냄새, 누군가 해 놓고 간 방뇨의 여운들까지 몽땅 고행의 길 위에 머물러 오체투지를 맞이한다. 하여 2008년의 오체투지는, 2천년 전 수도자들의 고행 길보다 더욱 힘겨운 고행이리라.
걷고 절하고 걷고 절하며 길을 가는 사이, 점차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 간다. 똑같은 몸짓을 수백 번 반복하고 있는 탓인가? 행렬을 스쳐 지나는 차량의 굉음도 이제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앞서가는 순례의 행렬을 따라 생각 없이 길을 갈 뿐이다. 다만 반배를 할 뿐인 내 몸에 조금씩 고통이 쌓여 온다. 내 몸 곳곳에서 안 쓰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른다.
저만치 앞서 가는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그리고 십여 명의 순례단 사이에서 언제부터인지 끙 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 나온다. 고통이다. 스스로 힘들게 길을 가며 ‘땅깔’이 되어 버린 순례단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고통인 것이다. 그럼에도 헐떡이는 숨소리는 좀체 들을 수 없다. 스스로 ‘땅’에 몸을 깔아 내리며 온 몸에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육체의 고통을 호소하며 호흡조절에 기대어 고통을 덜어 보려는 어설픈 노력은 하지 않는 듯하다. 아마 이들은 오체투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나보다.
잠시 쉬는 시간, 먼지 덮인 길 곁 풀섶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바람결에 강아지풀 하나가 여린 몸을 떨며 흔들린다. 저 가느다란 강아지풀은, 이 찻길 옆에서 태어나 비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여름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밟아 꺾어지거나 겨울이 되어 말라 없어질 때까지 이곳에서 일생을 보내고 마칠 것이다. 검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와 뜨거운 열기,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뿜어내는 매연과 쇳소리를 고스란히 겪으면서. 이 강아지풀의 일생이, 지금 오체투지의 고행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2008년 피폐한 한국사회의 바닥을 살아가는 수많은 서민들의 군상을 떠올려본다. 하루 종일 길바닥에 앉아 채소를 팔아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님들, 새벽 출근길을 나서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도 그다지 희망은 보이지 않는 님들, 온 몸에 오물 비린내를 발라가며 쓰레기를 치우는 님들, 남이 버린 쓰레기더미에 올라 앉아 폐지며 빈깡통을 찾아 모으는 님들, 실업의 고통을 감내하느라 도심의 밤길을 먼지 나게 뛰어 다니며 취객의 차량을 대신 운전하는 님들... 다들 강아지풀의 일생이요, ‘땅깔’로 가는 오체투지의 고행이 아닌가?
벌써 오전시간이 다 지났나보다. 오전 순례는 논산의 대한민군 육군훈련소 앞에서 끝이 난다. 훈련소 앞에 다다르자 길은 더욱 비릿한 냄새로 순례단을 맞이한다.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길이 더럽다는 것을 실감한다. 마침 훈련소에 입소하는 시간인지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이들, 작별하는 가족들이 수백 명의 인파다. 땅 바닥을 기어오며 연신 절을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 몇 사람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지고, 어떤 이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아무 표정 없이 눈길을 돌리고 만다.
순례단 아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자 하니, 이 이상한 행렬 속에 멀쩡한 모습으로 끼어 있는 내가 스스로 생뚱맞게 느껴진다. 이렇게 땅바닥에 엎드려 기고 있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땅깔’로 보지는 않을까? 아니 어쩌면 ‘땅깔’로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2008년 오체투지의 고행을 시작한 님들은, 이 세상의 ‘땅깔’이 되고자 하는 님들이다. 스스로 낮게 엎드려 ‘땅깔’의 길을 가고자 하는 님들일 것이다.
세상의 땅깔, 이 세상 사람의 대부분인 땅깔, 수많은 땅깔들, 그 언저리에서 내가 머뭇거리고 있다. (남월 김수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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