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6회)
모여라 오거리로...
5월 19일...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5월 19일 투쟁 상황-
80년 5월
18일 계엄군 진주 이후, 많은 학생들은 검거를 피해 숨어 있는 시위 지도부를 기다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주를 비롯한 전북에서는
친인척이나 이웃들의 소식을 통해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시민들이 라면을 사재기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이미 그 동안 가두시위와 농성 속에서 서로
얼굴을 익혔으나 덜 조직화돼 있던 학생들은, 거리에서 수인사를 하며 정세를 논의했고, 광주에서 들려 오는 학살의 소식도 입에서 입으로 퍼져
갔다. 이러는 사이, 전주 금암교회, 남문교회, 전북대 흥사단, 전북대 민속극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던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투쟁방법을 논의하고, 이중 전북대 민속극연구회 소속 최순희(당시 전북대 독문 3, 92년 사망)를 비롯해 박성욱(전북대 철학 3),
정해동(전북대 사회학과 3, 현 목사) 등이 주도적으로 나서 3,4 개의 모임이 이뤄졌다.
다시 18일로 돌아가면, 계엄군이 대학을
점령한 5월 18일 밤부터 5월 19일 새벽 사이, 전주 시내 곳곳에는 시민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대자보가 나붙는다. 월요일 하오 5시, 정해동,
이완배(현 교사)등 30여명은 전주시 고사동 오거리에서 시위를 시도했으나, 불과 1, 2분만에 해산, 달아나야 했다. 덕분에 그 시간 주변
당구장 등에 있던 애꿎은 젊은이들이 계엄군들에게 뭇매를 맞으며 연행당하는 풍경도 벌어졌다. 삼엄한 계엄군의 경계 속에 시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날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힌 이흥복(당시 전북대 농학계열 1학년), 유홍렬 등은, 이 시각 오거리
주변에는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몰려 나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시내에 몰려 있는 걸 지금껏 본 일이
없어요. 제가 헤아려 볼 수는 없었지만, 제 눈에는 2,3만 명쯤 되어 보일 만큼 굉장히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어요." 이 많은 인원이 함께
시위를 벌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기록은 따로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 있었고, 계엄군과 경찰 병력의 삼엄한
경계 속에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생각할 수 있다. 그 무리 가운데 정해동, 이완배를 중심으로 한 30여 명이 차도 한
가운데로 뛰어 나와 시위를 벌인 점은, 비록 잠깐으로 그쳤을망정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수많은 군중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이들 대학생들의 시위가,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광주와 같은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이고, 만일 군, 경찰병력과 직접
충돌하는 사태로 갔더라면 어떤 사태로 증폭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날 하오, 전주 역에서 가까운 고사동 오거리, 또 미원탑, 시청(지금의
기업은행 전주지점 자리) 앞 등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고, 전북대 등 각 대학에서 며칠 전까지 시위, 농성을 벌였던 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거리거리에 진치고 있던 탱크의 위압과 계엄군의 살벌한 표정, 경찰의 감시 따위가 5월 19일 전주의 시민들을 몹시도 무겁게
짓눌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날 이미 이웃 광주에서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감안할 때, 전주에는 더욱 삼엄한 경계가 내려져 있었을
것이란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오거리에서 잠시나마 구호를 외치며 호소하던 소수의 시위학생들은 황급히 달려오는
경찰 병력을 피해 전주역 쪽으로 뛰었고, 일부는 마침 지나가던 시내버스에 올라타고 달아나기도 했다. 먼저 용감하게 나선 시위대열이 허무하게
흩어지고 무장병력이 눈을 부릅뜨고 뒤쫓는 상황에서, 인도에서 숨죽이고 있던 대다수의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알려라...
잡히고 흩어진 동지들
5월 24일 유인물 배포작전-
5월 19일 전북대 민속극연구회의 탈춤꾼 최순희, 박성욱 등은 김상배(당시 방위병)의 집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신군부의 만행과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로 했다. 모든 매스컴이 차단된 상태에서 신군부의 만행과 도구로 유인물은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음날 이들은
쉽게 다른 모임과 연결돼 의견을 같이한다. 23일 전주시 효자동 효자아파트 5동 307호에 10여명이 모였다. 전주 금암교회 등사기로 유인물을
찍고, 이승희(당시 전북대 경제3), 정해동, 최순희 등이 책임을 맡아 20여명의 유인물 배포조가 짜여졌다. 이들은 신군부에 대한 폭로, 광주
학살 소식을 주 내용으로 24일 하오 2시 오거리에 모여 시위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했다. 유인물을 뿌리는 시점은 24일 새벽,
전주시내 전역에 뿌리기로 했다.
한편, 이승희는 이날 밤 광주를 탈출해 전주에 도착한 김현장과 김현장과 엠네스티(국제사면위) 후배인
노동길(전북대 80년 졸업생)을 만난다. 김현장을 통해 노동길과 이승희는 광주의 진상을 상세히 알게 되고, 김현장이 작성한 전주환의
광주학살작전이라는 유인물을 24일 하오 2시를 전후해 배포하기로 한다.
5월 24일 두 종류의 유인물이 전주시내 전역에 뿌려진다.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 사이 전북대생들이 제작한 '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하의 유인물이 전주시내 전역에 뿌려졌다. 정해동은 덕진동
주택가, 이승희는 풍남동과 교동, 박영식은 인후동 주택가에서 유인물을 돌린다. 정오가 되자 비상이 걸린 계엄군이 35사단에서 출동해 전주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오후 1시 전주 중앙성당에서는 김현장이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제하의 유인물이 학생들의 손에 나눠지고, 박성욱,
이승희, 박영식, 정기일, 정찬홍 등 전북대생들은 시내버스 정류소와 육교 등을 다니며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뿌린다. 오후 2시 시위 예정장소인
오거리에서 박영식을 비롯, 여러 명이 사복형사들에 의해 체포된다. 다른 이들은 경찰을 피해 숨었으나, 일주일 여 만인 6월 초 정해동, 이승희,
황 철 등 9명이 체포된다. 전주경찰서에 구금됐다가 35사단 헌병대로 압송된 이들 가운데 정해동, 이승희, 박영식은 기소돼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헌병대 감옥으로 이송된다. 주동자 중 최순희는 검거망을 피해 다니던 중 7월 10일 경찰에 체포됐다가 7월 25일 석방된다.(만 18세의
미성년자였고, 앞서 잡힌 이승희 등이 이미 계엄당국으로 넘겨져 사건이 종결됐던 덕분으로 보인다.)
(2003.5.20 전민일보
5월특집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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