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기록실/기록·1980년5월전주

들꽃처럼 지다

행인(杏仁) 2005. 5. 13. 10:44
 

1980년 5월 전주, 그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5회)


한국의 80년 5월, 첫 희생자 이세종

80년 5월 17일 밤 12시, 그러니까 5월 18일 자정을 막 지나면서, 전북대 학생회관은 익산시 금마면 소재 7공수 31연대대 소속 계엄군의 작전 현장이다. 온 건물을 흔드는 군화발 소리와 거친 고함 소리, 그 사이로 짓밟히는 학생들의 비명소리만이 뒤섞인 아수라장이다. 농성학생들은 곤봉과 군화발에 무자비하게 짓밟힌 채 질질 끌려간다. 잡힌 이들은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채 군용 트럭에 던져진다. 군인들은 눈을 부라리며 학생회관 곳곳을 뒤지고 다닌다. 학생들은 좁은 차 한 대에 실린 채 3시간 넘게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기다린다. 손목을 조여오는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다 뚝 멈춘다. 지켜 섰던 군인 하나가 대검을 빼 치켜든 것이다. 어렴풋한 불빛에 날선 대검이 시퍼렇게 비친다. 놀란 이들의 겁에 질린 표정들! 대검은 손목에서 피를 흘릴 정도로 조여진 어느 학생의 손목으로 다가가 포승줄을 잘라낸다. "내가 포승줄을 풀지 못해 자른 거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억세게 학생들을 묶었던 것이다. 트럭에 실려 있던 이들 중 몇은 엄습하는 공포감 속에서도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군인들이 무전기로 주고받는 말, "학생 한 명이 학생회관에서 떨어져 죽었다."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의 죽음은 이랬다. 그 죽음을 목격한 이는 이 시각 옥상에 올라가 그를 짓밟은 군인들 뿐이다. 땅바닥에서 피범벅이 되어 발견된 이세종이 옥상에서 이미 숨을 다해 아래로 던져졌는지, 계엄군의 발표대로 난간에 매달리다 떨어져 숨졌는지, 떨어져 신음하다가 병원에서야 숨을 다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그 현장의 군인들이 나서서 고백하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이세종을 본 동료 학생들의 증언을 모아 보면, 이세종은 군인들이 뛰어들기 조금 전 학생회관 방송실에선 예닐곱명의 학생과 함께 다음 날 시위 때 사용할 "노래"를 녹음했다. 녹음 전에는 서로 대책을 논의하며 유광석과 함께 서울지역 대학들과 연락을 취하는 역할도 맡았다. 농성 기간 내내 이세종은 유인물을 뿌리는 여러 후배들 중 한 명이었다.
"군인들이 학교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이세종은 여학생회장실로 자러간 저희들이 걱정이 되었나봅니다. 문을 두드리고, 군인들이 들어오니 어서 피하란 말을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어요. 그게 세종이를 본 마지막 모습입니다. 피하란 말은 들었지만 저희들은 어디로 피해야하는지도, 그리고 이미 경직된 몸이나 마음이 도무지 이 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김성숙)
"농성장 문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서너 개 내려 왔을까! 앞에총 자세로 착검한 총을 앞세워 4-5열 종대로 계단을 밀고 올라오는 2,3십 명의 계엄군(당시에는 공수부대원임을 몰랐음)과 맞닥뜨리는 순간 공포에 질린 세종과 나는 순간적으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운명의 순간, 거기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되어 버린 그 찰나의 시간 -아니 세종군에 대한 참회와 이후 기억하기조차 싫었던-은 그렇게 이어진다. 나는 2층 화장실로 도망쳐 창문을 통해 베란다로 도망쳤지만 곧바로 뒤쫓아온 일단의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구타와 함께 붙잡히고 말았는데 다행히도 위관급 장교로 기억되는 지휘관의 제지로 부질없는 생명은 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3층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쫓겨 간 세종군은 불행히도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가해자는 말이 없고 피해자 또한 말이 없으니 어느 누가 그 상황을 증언할 수 있겠냐마는 순간적 생과 사를 달리한 내가 폭행과 구타를 당했던 것을 기억하면, 그 옥상에서의 상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유광석 )
이세종은 결국 광주에서 처음 인명피해가 발생한 18일 오후보다 반나절 이상 먼저 신군부에 의해 타살된 5월 항쟁의 첫 희생자가 됐다. 5.18의 엄청난 비극을 예고하는 서곡이 된 셈이다.

13년만의 사인 규명

당시 계엄군은 이세종 열사의 죽음을, 학생회관 2층에서 농성을 벌이다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하자 옥상으로 달아나다 떨어진 '단순 추락사-계엄군이 난입하자 무서워서 피하던 중 난간에 매달려 자연 추락한 것' 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어이없게도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단순추락사로 단정되고 말았다. 당시 사망진단서(부검의 전북대병원 이동근박사)는 직접사인을 '두개골 골절 및 두개강내 출혈'로, 부검 결과는 '상박골 및 슬개골 골절, 간장파열, 복막후강내 출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동근 박사는 13년 뒤인 지난 93년 6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발급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이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이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세종이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미 무차별 폭행을 당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최소한 단순 추락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고귀한 죽음 

이세종 열사의 죽음이 명백히 알려지고 사람들 가슴속에 고귀한 희생으로 자리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걸려야 했다. 5년이 지나서야 당시 동료들과 전북대 총학생회가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를 세우지만, 군사 정권의 눈치를 보던 학교측의 탄압으로 쉽지만은 않았다. 85년 5월 18일 전북대 민주광장에 '고 리세종 열사 추모비'가 세워지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학교와 경찰은 비석을 뽑아 숨기고, 학생들과 추모비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85년 전북대 총학생회장 김중길씨는 "몰래 만들어진 비석을 간신히 학교에 가지고 들어왔더니 교수들이 우리를 막았다"고 말한다. 88년에는 광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심사대상에서 제외했다. 88년 6월 16일 다시 추모비가 세워지고, 89년 이후 끈질기게 이세종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금씩 진전을 보여 95년 2월에야, 전북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다. 이어 98년 10월 광주민주화관련 보상심의회 에서조차 논란을 벌인 끝에 뒤늦게 5.18 사망자로 인정돼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을 받고, 99년 4월 비로소 광주 망월동 신묘역 4-11에 안치된다. 광주관련 보상의 기준이 시기, 장소, 민주성이고 유독 전남·광주로만 지역을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생겼던 문제다. 모교에 초라한 추모비가 세워지는 데에 5년, 명예졸업장을 받는 데에무려 15년이 걸렸고, 숨진 지 19년만에야 광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2003/5/19 전민일보 5월특집시리즈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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