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래도 상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싸움이 잘 나지 않아.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하든 절충을 하든 타협을 하게 되거던.
막상 싸움이 나는 건 충돌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충돌위험이 생길 때야. 예기치 않은 위험에 빠진 쪽은 일단 감정이 상하고 위험을 저지른 쪽이 그걸 달래주지 못하면 감정부터 충돌하니까. 만일 달래주긴 커녕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면 싸움이 나는 건 불 보듯 뻔하지.
2
속없이 좋아요를 누르다 말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B와 C가 나 몰래 만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일순간 스쳐갔다.
가로등 빛에 띈 손등에 모기 한마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막 빨대를 들이대려는 녀석을 입김으로 불어 날려 보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여지없이 찰싹 때려 뭉갰을 테지만, 웬지 모기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하루살이 같은 자신의 처지가 연상돼서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지. 알 수 없어."
A는 중얼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B와 C가 연애편지를 주고받든 함께 잠을 자든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C의 열렬한 구애를 모르쇠로 일관한 A로선 당연한 일. 그런데도 오늘 새벽 이 시간,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 건 무엇 때문인가?
3
가끔은 시체 되리라
시간을 넘어선 육체
시간 밖 존재
시간을 지체시키는 것들을 향해
배짱 한번 튀기라
4
찻집 문을 미는 순간 나는 그를 알아 보았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거만하나 방자한 표정으로 웬 여성에게 너스레를 한창 떨고 있는 그,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 어느 기업의 고위직이었고 추문을 몰고 다녔으며 한 때 무슨 일로 만난 자리에서 예의없이 반말짓거리를 했던 자였어.
난 그가 앉은 좌석 옆을 스쳤고, 순간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고개를 내 쪽으로 들어 올려다 보았어.
허나 이미 나는 안경을 벗어 줄에 늘어뜨린 채 그를 못 알아본 척 휙 지나쳤다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지만 자꾸만 그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하는 거야.
아는 척 하며 너스레를 떨고 싶었을까?
어쩜 그가 지금 사기극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고, 즉석에서 날 행인 1로 등장시킬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
약속시간이 겨우 5분 남았지만, 이런 생각이 들고 보니 앉아 있기가 싫어졌어. 벌떡 일어나 찻집을 나와 버렸지.
난 그 行人이 아니지 않은가 말야. 杏仁을 行人으로 취급해선 곤란하지. 암! 안 되고 말고.
5
아무리 먼 길인들
끝 없는 길 어디 있으랴
나는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는 다리를 지녔으니
이것을 곧 생각이라 하라
6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A가 켐벨이라는 낱말이 떠올린 건 우연이었을까? 커피 맛은 풍부하다 못해 지나치게 현란했다.
켐벨이라는 그 낱말,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농업시간에 그림만 보며 외웠던 포도의 한 종류 아니던가?
바리스타는 커피의 원산지를 말해주지 않았고, 다만 아메리카산 스페셜티라고 되뇌었다.
이런 제길헐! 오로지 다람쥐 똥이라고 하는 분뇨 냄새와 흙맛이 묘하게 섞인 Con Soc, 커피향을 지배하지 않은 그것이 문득 그리워졌다.
목을 넘긴 커피는 게다가 복숭아맛과 파인애플이 섞인 과즙의 그것에 가까운 신음을 토해냈고, 곧이어 역겨운 트림이 공중에 쏟아져 나왔다.
7
믿었던 풀들마저 춤추는구나
누가 풀 아니랄까봐
이까짓 비바람에 온 몸을 떠느냐
적어도 너는
비 내리면 내리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그대로
당당히 서 있을 줄 알았거니
나는 오늘밤 떠나리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차라리 황량한 사막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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