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된 불공정
요사이 우리 언론의 테마는 공정한 사회, 공정한 기준, 공정한 경쟁이 주류이다. 각 방송채널마다 공정하지 못한 정부기관의 인사 관행과 내부비리,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고발자들의 문제 제기가 터져 나온다. 이런 흐름의 바탕에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적 의지가 깔려 있다. '공정사회'는, 임기후반으로 접어든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국정 키워드 아닌가.
이러한 ‘공정사회’의 흐름은 사회현상으로 이어지는 분위기이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 특채파동으로 낙마한 데 이어, 특채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5급 공무원 채용시 절반까지를 외부 전문가로 특채하려던 정부 방침도 좌초됐다. 정부의 국정지표인 친(親)서민과 `공정한 사회'에 역행한다는 여론에 부딪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당분간, 언론에서는 각계각층의 불공정한 사건을 주제로 한 사회고발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룰 것 같다. 우리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불공정함’을 고발하고 공정하도록 바꿔가는 일은 언론매체가 의무감을 느끼는 하나의 덕목이기도 할 터. 아마 사회 곳곳에서 공정하지 않은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여론의 힘을 빌려 원하는 바를 이루는 일도 줄줄이 나타날 성 싶다.
사실 ‘불공정’은 법이 없고 제도가 없어 일어난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각종 법규와 절차가 갖추어진 시스템이 있다. 그럼에도 제도와 법이 안지켜져서가 아니라 편법을 동원하여 꼼수를 부리기 때문에 문제였다. 규정의 허점이나 변칙을 이용해 요식적인 절차를 갖추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척 한몫 챙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도와 법은, 편법과 꼼수를 제어하는 장치가 아니라 합법성을 부여하는 면죄부로 이용됐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런 편법과 꼼수가 판을 쳐온 게 사실이기에, ‘공정사회 실현’에 기대를 거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민주화의 진전 속에서 정의는 세워져 왔으나 공정한 경쟁은 ‘부재중’이었다. 경쟁에서 돈과 권력은 우선권을 쥐었고 기득권을 꾸준히 키워왔다. 심지어 제도와 법마저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졌다.
불공정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돈 없고 권력 없는 이들에게 공정한 사회, 공정한 질서, 공정한 경쟁이란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겠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현 정부가 집권 이후 제시한 정책기조 가운데 가장 칭찬받을만한 일이 될 지도 모르겠다. 화두가 되어버린 이 ‘공정사회’의 구호를 국민이 얼마나 신뢰하는가는 제쳐놓고라도 말이다.
'공정 사회'라는 화두는 그동안 경제성장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한국사회가 간과해왔던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한국사회의 선진화를 위해선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권력층과 기득권층이 누려온 각 부문의 특권을 철폐하고 불공정한 관행을 없애야 한다. 국민에게 고르게 법이 적용되는 법치질서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사회적ㆍ경제적 소외를 없애는 것이 공정사회의 기초인 셈이다.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 당연한 구절에 대해 선뜻 환영의 박수가 터져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이제 어지간한 수사(修辭)로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명분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말과 처신이 이율배반적일 때가 많다. 여기에 발목이 잡혀 말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꿔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일시적인 유행가나 사회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밑바닥까지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일이다. 그러려면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절차를 공정하게 진행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지금 우리 사회의 불공정성을 떠받쳐 온 큰 틀의 제도부터 수정해 나가야 한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 지방과 지방의 격차, 교육제도가 낳은 불공정 게임의 현실 같은 것들을 말이다.
불공정한 역사를 일신해 가려면 과거에 대한 자기 평가도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 '공정'이란 잣대로 다시 평가받을 일이 가장 많은 계층은 바로 현 집권세력의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보수 기득권층 아닌가. 과거에 대한 냉엄한 자기평가와 반성, 그만큼의 대가도 공정하게 치러야 하겠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이란 참 오래 묵어 단단히도 다져진 것이다. ‘공정 사회’란 말이, 이미 굳어져버린 불공정을 외면한 채 그저 겉으로 반복되는 수사가 결코 아니기를 바란다. (독자권익위원, 전북의정연구소 주간 金壽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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