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인

절망의 편지

행인(杏仁) 2005. 5. 21. 12:02

병이 깊어진 것은 끝없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시작한 병은 욕심을 막는 다른 것들을 경계하게 했고,
사랑을 독점하고픈 갈망에 사로잡힌 눈동자에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한 질투심이 가득 차고  
혼자 채우지 못한 허탈함 때문에 온몸에 고통만이 번졌습니다.

지나치게 기다렸습니다.
어제 시작한 기다림이 오늘을 지나 내일로 가고, 그렇게 기다린 것이 지나칠지
라도
어느 골목 모퉁이 남의 집 처마 밑에서라도 가느다란 빛살이나마 ,
어느 은행나무 아래에서 따뜻한 웃음이나마
마주치는 것으로라도 행복해지길 바랬습니다.  

지나치게 바랬습니다.
바랜 만큼 기도가 응답이 되어 돌아오리라 믿었던 게 잘못입니다.
바라고 또 바라면 그저 소원이 이뤄질 줄만 알았습니다.
일어나 뛰지 않아도 땀 흘리지 않아도
기도만 하면 사랑이 오고 은총이 내리는 줄만 알았습니다.

지나치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던져진 일 다 제쳐 두고서도
마냥 생각하고만 있으면 그걸로 좋은 건 줄 알았습니다.
남겨 주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좋은 말씀의 마디마디를, 말씀의 주인을 생각만 하고 있음으로 행복해 했습니다.

지나치게 매달렸습니다.
매달린 만큼 당신께서 붙잡아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만의 빗방울이 땅을 적시고 강이 되어 흐르는 걸 보면서도
젖은 대지에 농사지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당신의 소맷자락 붙들고 끝내 매달림으로 추수할 수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병은 나을 수 있을 지 몰라도 병의 뿌리는 캐낼 수 없습니다.
병든 세포가 끝내 뼈 속을 파고들며 살갗이 타면 모진 목숨 하나 사라질지 몰라도
한 시대 저편에서 태어난 이 벌거벗은 몸둥인 당신의 은총 였으니까요.
뜻밖에도 병의 시작이 돼버린 잘못의 처음 모습은 믿음과 우러름 였으니까요.
단지 이 믿음과 우러름이 방황으로 잘못 접어 든 그 갈림길까지만 돌아가야 합니다.

 

19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