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乙)의 폭동
영국, 칠레, 이스라엘 등 지구촌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이 잇따르고 있다. 동시다발적인 시위와 폭동의 중심에는 학생‧이민자‧서민층 등이 있다. 이러한 폭력사태를 분석하는 이들은, 양극화를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시된 각국의 긴축재정 정책 여파로 양극화가 가중되면서 민생고를 겪고 있는 이들 계층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다는 것이다.
런던 토트넘에서 시작돼 버밍엄· 맨체스터·리버풀·리즈·노팅엄 등 영국 전역으로 확산된 젊은이들의 방화와 약탈 등 폭력행위, 그 이면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빈곤이 심각하고 실업률이 높은 지역에서, 주미들의 경제적 불만이 경찰을 향한 의심과 분노를 더해 가면서 폭동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남미의 칠레에서는 대학생·교사·학부모 등 수 만 명이 공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는 수도 산티아고 뿐 아니라 아리카와 발파라이소, 콘셉시온 등 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벌어졌다. "지방정부가 공립학교를 운영하는 바람에 교육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는 만큼 공교육을 전적으로 중앙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시위대의 주장이라 한다.
칠레의 학생 시위는 인접 아르헨티나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칠레 학생 수백 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칠레 교육 시스템 개혁을 촉구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도 서민층의 크고 작은 시위가 한 달 째 이어지더니 9월에는 전국 50개 도시에서 서민층을 중심으로 '100만 명의 힘'이라는 이름의 행진을 벌일 계획이라 한다. 높은 집세와 고물가에 항의하는 시위다.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고 있는 시위·폭동은, 실업·빈곤 등 민생고가 가중된 상황에서 서민층·청년층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시위·폭동의 바닥에 오랫동안 응어리진 약자들의 불만이 마치 화약가루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우리 사회에도 경고하는 바가 크다. 이들 나라처럼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가 결코 안심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한국사회의 청년실업률은 7.3%로 단순히 수치상 실업률로 보면 비교적 낮은 편이지다. 하지만, 기실 이 청년실업률이란 게, 아예 취업을 포기하고 창업을 시도하는 사람이나 군 입대자, 재학생, 휴학생, 취업재수생, 대학원생 등을 빼고 집계한 수치이다. 실제 청년 고용율은 40.3%에 그치고 있다. OECD국가 중 최저 수준이다.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절대 낙관할 수가 없다. 수많은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고, 대부업체의 고리채에 매달려, 내일을 향한 꿈은커녕 오늘을 버티기조차 힘겹다.
청년들의 실업 문제는 나아가 사회 전 계층의 생활고로 확대되고 있다. 경기불황의 늪이 갈수록 깊어지는 사이에 고용불안정은 더욱 서민 삶의 뿌리를 흔들어 대고 공공 물가는 지속적으로 치솟는다.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은 약발이 전혀 먹히지 않아 전셋값도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으니
이명박 정부는 공정사회를 내걸고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외치고 있지만, 그 구호란 게 좀체 국민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서민들에게, 갑이 아니라 을의 처지에 놓인 모든 이들에게는, 때로 어떤 구호란 것이 피부에 살갑게 와 닿기보다는 따갑게 피부를 찌르고 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무겁게 인식해야 하겠다.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는 하였으되, 지금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폭동사태는 다름 아닌 을(乙)들의 폭동이다. 삶의 하루하루를 갑(甲)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맡겨버렸던 을(乙)들이,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숨 쉴 수 없는 처지에 이르러 끝내 울분을 터뜨려버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그늘 아래 헐벗은 을(乙)은 그 숫자만 날로 늘어 가는데, 우리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의 땡볕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영국, 칠레, 이스라엘의 상황은, 분명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이다. (김수돈/ 독자권익위원. 전북의정연구소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