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약도 잘못 쓰면 독약인 것을
필자는 항생제 주사를 맞지 못한다. 젊은 시절 급성간염으로 쓰러져 세상을 등질뻔 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 의사에게서 항생제를 피하라고 경고를 들었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다가 아뿔싸 항생제 주사를 맞고는 내리 사흘 동안 실신상태에 빠졌던 일이 있다. 이런 사고 이후로는 감기에 걸려도 아예 병원 근처에도 가질 않는다. 요사이 잘 나가는 소아과 병원들이 항생제를 과다처방한다는 뉴스를 들으니,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퍽 씁쓸하다. 항생제를 남용하면 인체에 부작용이 있다는 것쯤은 대개 아는 사실이다. 양약도 잘못 쓰면 독약이라지 않았는가.
헌데 지금 교육과학기술부가 ‘양약’을 채택해 ‘독약’으로 쓰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다름 아닌 ‘독서교육지원종합시스템’이란 것이다. 교과부가 '독서교육지원종합시스템'을 구축해 전국의 초·중·고교생의 독서 활동을 통합 관리한단다. 750만 명 초·중·고교생이 읽은 책과 독후감 등을 온라인을 통해 누적관리하고, 학생들의 독서 활동을 국제중이나 특목고는 물론 대학 입학사정관제 전형에도 참고 자료로 활용토록 한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양약이 될 것을 독약으로 변질시켜 퍼뜨리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중앙정부가 학생의 독서마저 관리하다니, 이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해당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초·중·고 12년 동안 학생들이 독서 활동을 한 이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축적하는 것은 개인의 지적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꿈을 키우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일에마저 정부가 끼어들어 관리하겠다는 것인지, 그 발상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는 학생 개인의 '사상 검열' 장치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
둘째로, 독서 이력을 대입에 활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교육적이다. 나라 교육을 책임지는 교과부가 이런 비교육적인 일을 저지르다니 어이가 없다. 대학의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독서 활동이 평가대상이 될 수는 있다. 논술이나 면접에서도 간접적으로 개별 학생의 독서활동 경험을 진단해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하더라도 문답 등을 통해 드러나는 독서 결과와 여기서 비롯된 학생의 ‘내공’을 평가하는 것이 맞다. 독서 이력 자체가 평가 자료일 수는 없는 일이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아이들이 방학숙제용으로 일기를 무더기로 쓰듯이, 독서도 그렇게 형식을 갖추기 위해 입력해 가란 말인가?
또 하나, 교과부가 맘먹고 해 놓은 이 독서지원시스템이란 것이 벌써부터 또 다른 형태의 사교육을 조장하고 있다. 독서논술 학원 등에서는 벌써 독서지원시스템에 입력할 내용을 만들어준다느니 독서도 입시 전략이라느니 하며 독서지원시스템에 대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나의 교과목이 생긴 셈이니, 사교육시장에는 또 하나의 장사거리가 탄생한 것이다. 독서가 비교과 활동의 하나이자 자기주도 학습의 평가대상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지원시스템까지 운영한다고 하니 학부모들로서야 새로 추가된 또 하나의 교과목으로 여길 수밖에. 그렇다면 독서 이력 관리를 위한 사교육 수요가 새로 생겨나는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결국 교과부의 ‘독서교육지원종합시스템’ 정책은 양약을 독약으로 잘못 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사실 몇 년 전 부산시교육청이 이것을 시작했을 때 ‘독서교육지원종합시스템’은 ‘양약’으로 출발했었다. 초·중·고생들이 책을 읽고 독서교육지원시스템 홈페이지에 접속해 책 내용 관련 퀴즈를 풀고 독후감을 올리고, ‘재미있는 책읽기’를 유도하기 위해 독서이력철을 만들어 누적 관리하게 했다. 학생들에게 독서는 입시 공부에 밀려 뒷전 신세이던 실정에서, 새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도움을 제공하는 ‘뒷받침’의 역할에 있었다. 지금 교과부가 하듯이 뒷받침을 넘어서 평가대상으로 삼고 대입전형의 자료로 삼는 것은 양약이 될 수 있는 좋은 ‘뒷받침’ 정책을 오히려 독약으로 사용하는 격이다.
교과부의 독서지원시스템은 발상부터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교과부는 그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지금이라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이보다는, 학생들이 스스로 즐기면서 다양한 독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독자권익위원, 전북의정연구소 주간 金壽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