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기록실/기록·杏仁Column

색깔 있는 아침을 기다리며

행인(杏仁) 2010. 5. 13. 17:29

 매일 아침 우리 지방 일간지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대체 이 신문의 색깔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나름대로 소신을 지니고 신문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매일 같이 신문을 뒤적이면서도 신문의 색깔을 그다지 느낄 수 없는 것은 독자로서 답답한 노릇이다. 어쩌면 필자가 불량한 독자인 탓에 색깔을 잘 읽어내지 못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신문마다 추구하는 바가 있기는 하되 색깔이 약해서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무려 13개사에 이른다는 도내 지방 일간지 가운데, 자기 색깔을 지닌 신문이 있는지 그 신문의 종사자들은 늘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전국 일간지들을 보자면 조중동의 노골적 보수성에서 한겨레나 경향의 진보적 면모까지, 신문의 색깔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공공 전파매체라 하여 제약이 심한 방송 보도에 비해, 이렇듯 신문의 보도가 정파성(政派性)을 띠는 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다 보니 독자들은 자신의 입맛대로 신문을 골라 읽는다. 아침마다 현관 앞에 배달되는 신문을 읽으며 자신이 바라는 색깔을 자신의 사고(思考)에 덧칠해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색깔 저 색깔의 신문을 골고루 읽어보며 보다 객관적 시각을 견지하기 위해 힘쓰는 이들도 적지만 있기는 하겠다. 허나 대다수의 독자는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신문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신문을 바란다. 그래서 신문마다 독자층이 형성되고 그 신문을 통해 여론을 모아가는 지지세력이 형성되어 간다.

 

신문의 색깔, 정파성은 지면 곳곳에서 제한적으로 드러난다.

독자 입장에서 신문의 색깔을 확인해 보자면, 먼저 ‘이 신문은 어떤 기사를 취급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언론 보도의 영역에서 정파성이란, ‘어떤 사실을 보도할 것인가’를 취사선택하는 측면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만약 사실보도의 과정에 정파성이 허용된다면, 사실 보도 자체가 위협받는 사태가 발생한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을 일방적 주장에 기대어 보도하거나, 보도 내용이 추측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이는 사실 보도가 아니라 일방적 주장과 추측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문이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면서도 자기 색깔, 정파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보도할 수 있는 수많은 사실’ 가운데 ‘제한된 지면에 실을 사실’을 취사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겠다.

 

또 하나 ‘이 신문은 어떻게 논평하고 있는가’를 보면 신문의 색깔, 정파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언론 보도 가운데 논평 기능은 '언론의 정파성'이 광범위하게 허용되는 분야다. 보도하는 어떤 사실과 연관된 이해관계를 정파적 측면에서 면밀히 파악하고, 이를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서, 국민들이 어떤 사실과 그 이해관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논평’기능이기 때문이다. 신문이 내는 논평은 대개 무색무취한 객관적 논리보다는 언론 자체의 색깔을 띤 주의주장이 되게 마련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파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아내고자 하는 것은 어느 집단이건 같은 목적이니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기자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에 의해 사실을 재단해서는 물론 안 될 일이다. ‘정파성 있는 논평’에는 객관적 사실보도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겠다.

 

다시 우리 지방 일간지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지방 일간지마다 어떤 독자층을 갖고 있으며 어떤 여론을 모아가고 있는가? 신문의 발행부수라든가 구독부수를 굳이 꼬집어 따질 것까지도 없다. ‘우리 신문의 독자층이 누구인가’를 냉정히 생각해 보면, 신문마다 각자의 색깔을 쉬이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인쇄매체의 전성기는 지났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지방의 현실은 아직 지방일간지의 춘추전국 시대다. 이런 시대에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면 누가 자기 신문의 애독자로 자리해 주기를 바랄 것인가?

내일 아침에는 현관 앞에 놓인 신문에서 그윽하고 진한 향기를 맛보고 싶다.

(杏仁 김수돈)